의학계의 불확실성에 과학사회학의 메스를 대다!

닥터 골렘

두 얼굴의 현대 의학, 어떻게 볼 것인가?

해리 콜린스, 트레버 핀치 | 옮김 이정호, 김명진

출판사 사이언스북스 | 발행일 2009년 6월 29일 | ISBN 978-89-8371-121-2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38x210 · 344쪽 | 가격 18,000원

책소개

‘과학’으로서의 의학과 ‘구원’으로서의 의료

현대 의학 옹호자와 비판자 모두에게 맞춤한 해독제!

생존율은 소생 노력이 갖는 러시안룰렛 같은 측면을 감추고 있다. ‘생존율’이라는 용어는 생명 구조의 측면을 강조하는 반면, 동일한 의료 개입이 신경 손상을 일으킬 가능성, 실로 높은 가능성을 얼버무린다. …… 생존율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는 심폐 소생술(CPR)을 받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생존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이는 심한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가슴이 찢어지는 과정을 겪어 본 사람들의 딜레마와 동일하다.-본문 중에서

지난 2009년 5월 21일 대법원은 식물인간 상태의 어머니 김모씨에 대한 연명 치료를 중단해 달라며 병원을 상대로 낸 김씨 자녀들의 소송에 대해 “연명 치료를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 존엄을 해치게 되므로 환자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인간 존엄과 행복추구권을 보호하는 것”이라 하여 존엄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또 “환자의 의사 결정은 사전 의료지시에 의해 이뤄질 수도 있고 환자의 추정적 의사를 인정하는 것도 가능하다.”라며 환자의 의사 추정은 객관적 자료 외에 환자가 평소 일상생활을 통해 가족, 친구 등에 대해 한 의사표현, 환자가 고통을 겪을 가능성 등도 살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2009년 6월 23일 세브란스 병원 측은 김씨의 산소 호흡기를 제거했다. 국내 최초의 소위 ‘존엄사 소송’과 판결, 시행은 그간 이어져 온 존엄한 죽음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논의를 더욱 활발하게 하고 있다. 앞서 2007년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 병원 김훈교 교수팀이 ‘사전의료지시서’와 관련해 말기암 환자(134명)과 내과 전공의(97명)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환자의 95.5퍼센트(128명)와 의사의 97.9퍼센트(95명)가 사전의료지시서 작성에 찬성했다. 환자의 59퍼센트(79명), 의사의 99퍼센트(96명)는 자신이 말기 상태에 이르러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위한 심폐 소생술을 원치 않는다고 밝혔는데 심폐 소생술을 거부 동의서 작성 시점이나 의사 결정권자 항목에서는 좀더 다양한 응답지를 선보였다. 의료 개입과 존엄한 죽음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는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이번에 (주)사이언스북스에서 펴낸 『닥터 골렘: 두 얼굴의 현대 의학, 어떻게 볼 것인가?(Dr. Golem: How to Think about Medicine)』은 바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저자들의 전작 『골렘: 과학에 대해 모두가 알아야 할 것』(국내 번역서 부제: 과학의 뒷골목)과 『확대된 골렘: 기술에 대해 당신이 알아야 할 것』에 이은 『골렘』 시리즈 3부작의 완결편이다. 이 책은 바로 일상적인 의료에서의 의사 결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구분, 개인을 위한 구원과 공동체를 위한 과학의 차이를 지식 사회학의 문제로 다룬 최초의 시도이다. 저자들이 현대 의학계에서 관찰해 낸 바로는 환자들은 (정통 의료든 대체 의료든) 전문가와 상담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정보를 수집하고 공부를 한다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과학자가 되려는 단계에까지 다양한 노선을 취하고 있다.

 

“책 제목의 ‘골렘’은 유대신화에 나오는 진흙과 물로 빚어낸 인간 형체의 피조물이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통제받지 않으면 주인을 파괴할 수도 있는 ‘서투른 피조물’로, 저자들은 의료와 의학 역시 불확실한 ‘골렘’이라는 주장을 여러 사례를 통해 펼친다.” —《경향신문》

“<골렘>, <확대된 골렘> 등의 책을 통해서 과학 기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자극했던 과학사회학자 해리콜린스와 트레버 핀치가 이번에는 현대 의학에 메스를 댔다. 이 책 <닥터 골렘>은 그 결과물이다.” —《프레시안》

편집자 리뷰

과학은 골렘이다

유대 교 신화에 등장하는 골렘은 진흙과 물로 빚고 주문을 걸어 사람의 형체를 갖도록 만든 피조물이다. 골렘은 사람의 명령을 따르고 일을 대신 해 주며 적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도 있지만 통제를 받지 않으면 주인을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골렘 과학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비난하면 안 된다. 그 실수는 바로 우리가 저지른 실수이기 때문이다. -해리 콜린스, 트레버 핀치
유대 민족을 구원해 줄 인조 인간에 관한 다양한 전설로부터 유래한 골렘은 점차 인간이 만들었으되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상징하게 되었다. 해리 콜린스와 트레버 핀치는 『골렘』 시리즈에서 ‘골렘’의 서투름에 대한 인식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의료 전문직과 의학은 반복해서 잘못을 범하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 일반, 그중에서도 특히 의학의 본질이다. ‘medicine’(학문과 과학의 의미가 강한 부분에서는 ‘의학’으로 의료 실행 측면을 가리키는 부분에서는 ‘의료’로 번역하고 있다.)에 거칠고 서투른 골렘 같은 성질이 있다고 하더라도 닥터 골렘이 전문성을 가졌음을 인정하는 한,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의학과 의료가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원 대 과학, 단기적 관점 대 장기적 관점, 개인 대 공동체의 문제라는 대립 구도에서 손쉬운 해결책은 없다. 저자들은 전적으로 과학적인 의학의 편에 서지도,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의료를 완전히 옹호하지도 않는다. 최선의 답은 이러한 고려 사항들을 깊이 염두에 두고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그 선택은 다양한 수준의 지식과 이해의 맥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과학 기술학 분야의 권위자인 해리 콜린스와 트레버 핀치는 플라시보 효과, 가짜 의사, 암 치료제 비타민 C, 에이즈 활동가 등의 쟁점을 짚어 가며 현대 의학의 불확실성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의료 과학의 불확실성의학의 심장부에 뚫린 구멍

플라시보 효과-무작위 대조군 시험라틴 어로 ‘기쁘게 하다.’라는 뜻의 플라시보 효과는 신체에 대한 분명한 개입 없이 마음이 몸을 치유하는 힘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이다. 때로 이 효과는 가짜 약을 처방함으로써 촉발되는데, 가짜 약은 종종 화학적으로 활성이 없는 물질로 만들어진 알약의 형태를 띤다.우리가 플라시보 효과를 과학적 의료의 심장부에 뚫린 구멍으로 지목하는 이유는 새로운 약이나 다른 치료법이 시험될 때 항상 플라시보 효과를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플라시보 효과는 아주 강력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만약 신약의 효능을 플라시보의 효능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건강이 개선된 것이 신약의 생물학적 효과 때문인지, 아니면 의료 인력, 의료 장비, 또는 그들이 제공하는 ‘약’이나 다른 ‘치료법’들 중 하나 이상과 접촉해 생겨난 심리적 효과 때문인지 구별하기가 곤란해진다.모든 질병들을 이해하는 위치에 서는 것은 의학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로서 이 단계에 이른다면 과학으로서의 의학․구원으로서의 의료, 장기적 관점․단기적 관점, 공동체의 이해관계․ 개인의 이해관계가 하나로 수렴한다. 그 전제 조건으로 생리학뿐만 아니라 사회 과학과 심리학 역시 완벽한 단계에 도달해야 하기에 그러한 상황이 언제 도래할 것인지, 도래할 수 있을지의 여부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언젠가 그곳에 도달할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의학이 많은 점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 매달려야 하는 이유이다. 과학을 희생시키거나 과학에 대항하면서 단기적으로 개인의 이득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것이 항상 옳은 선택은 아니며 최상의 선택도 아닐 것이다.

가짜 의사-숙련도와 자격증의 문제“실제 수련 외과의가 처음 병원에 오면 거의 하는 일이 없습니다. 나중에 내가 마취 의사였을 때 유심히 관찰해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18세 된 고등학생을 데려다가 이 일을 맡기고 1주일쯤 가르치면 5년 동안 훈련을 받은 수련 외과의만큼 조수 역할을 잘 할 겁니다. 하지만 물론 이것은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지요.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한 중간 단계 말입니다.” 의대를 중퇴하고 가짜 자격증으로 병원에 들어온 ‘닥터 도널드’가 실체가 드러난 후 고백한 내용 중 일부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의료상의 실수로 인해 발각되는 가짜 의사들의 수가 상당히 적으며 의료상의 무능함에 대한 비난을 조사할 때 의료적 불확실성의 정도가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의료에는 상당한 정도의 편차와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 상당히 무지한 가짜가 의료 전문직에 진입한 후 대중의 지식 결여와 심지어 의료 전문직의 심장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견해의 차이를 악용해 적어도 일정한 기간 동안 살아남는 일이 가능하다.가짜 의사들은 의료 실행에 얼마나 큰 불확실성과 편차가 존재하는지를 보여 준다. 의료 실행은 국가들 사이에 커다란 편차가 있어서 가짜 의사가 직무에 임할 때 처음 몇 달 간의 어려운 훈련 기간을 쉽게 통과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적어도 실수들 중 일부는 신출내기 의사가 훈련을 받은 다른 나라에서의 접근법 차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 넘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국가의 의료 체제 내에서 수용 가능한 치료법으로 간주되는 것들에도 커다란 편차가 존재하는데, 이는 가짜 의사들이 사후적으로 보았을 때 괴상하게 보이는 판단을 내리는 경우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 준다.우리는 우리를 치료해 주는 사람의 경험을 믿는가, 그의 자격을 믿는가? 주변의 지원 팀은 가짜 의사의 실수를 보아 넘기는데, 그 이유는 설사 고된 의대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의사라 할지라도 실제 의료가 실행되는 현장에 오게 되면 무지한 초보자가 된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가짜 의사의 사례는 질병을 이해하는 데에서 책을 통한 학습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중요하지 않은가를 보여 준다. 이는 우리가 책이나 다른 문서 자료들에서 충분한 정보를 얻어 의료 전문직에 도전하려 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생각을 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암 치료제 비타민 C-대체 의료를 바라보는 개인과 집단노벨 화학상(1954년)과 노벨 평화상(1962년)을 수상한 라이너스 폴링은 1968년에 분자 교정 의학이라 부른 새로운 분야를 제안, 분자 교정학을 “인체 내에서 정상적으로 존재하는 분자들의 농도를 조절함으로써 좋은 건강을 성취, 보전하고 질병을 예방 및 치료하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중요한 분자 교정 물질에는 비타민, 그중에서도 특히 비타민 C가 있다.”라고 했다. 처음에 폴링은 비타민 C를 감기에 대한 치료법으로 내세웠다. 1970년에 낸 책 『비타민 C와 감기(Vitamin C and the Common Cold)』에서 그는 비타민 C가 암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도 있을 거라고 짧게 언급했다. 이후 메이오 병원 실험을 비롯해 벌어진 각종 공방전을 거치고도 비타민 C를 이용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축적되지 못했다. 그들의 주장은 여전히 대체 의료라는 어중간한 세계에서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논리적인 측면에서 따져 보면, 비타민 C 치료법이 암의 증상을 완화시키고 환자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아마 연장시켜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주장이 결정적으로 반박된 적은 없다. 실험 결과들을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할 때 현재까지 입증된 사실은 이미 화학 요법이나 방사선 요법을 받은 환자들은 혜택을 볼 수 없으며 비타민 C를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만 투여한 환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설사 비타민 C가 효능이 있다고 해도 (이 역시 결정적으로 입증된 적은 없다.) 그것의 효능은 제한적인 환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닥치면 증명되지 않은 대안이라도 스스로 찾아 나설 권리가 개인들에게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으로서, 또 집단 책임으로서의 의료가 여론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 맡겨 두라.”라고 말하는 것은 설사 아프거나 죽어 가는 개인들이 치료법을 시도해 보는 데서는 여전히 현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학적 의료를 위한 우리의 장기적인 집단 책임을 방기할 위험을 안고 있다.

만성 피로 증후군과 에이즈 활동가-일반인 전문성의 두 양상1980년대에 부유하고 젊은 캘리포니아 주민들 사이에 유행하며 ‘여피 독감(yuppie flu)’이라는 비아냥거리는 별명을 얻게 된 만성 피로 증후군(CFS)은 진짜 질병인지를 놓고 계속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빌딩 증후군’, ‘걸프전 증후군’, ‘반복 사용 긴장성 손상 증후군’, ‘과민성 대장 증후군’에서 ‘섬유 근육통’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잘 정의되지 못한 질병들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환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환자들은 권익의 옹호자가 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때로는 자신들이 의료 전문직 종사자들보다 더 많은 전문성을 가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오늘날까지도 CFS가 진짜 질병인지에 관한 의문이 남아 있다. 이 병의 근원은 심리적인 데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연구들이 여러 차례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 연구들 역시 방법론적 근거의 측면에서 비판을 받았고 인과성의 방향을 돌려놓는 데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직 진단 기준이 없는 질병 같은 상태로 여러 해 동안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도 심리적 효과로 고통을 겪을 것이다. 이 연구의 저자들은 이런 의사들은 이 질병이 지닌 문제의 일부는 심리 사회 병리학적(psychosociopathological) 요소에 있음을 점차로 인식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환자들이 자신이 질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질병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게 되고, 이에 따라 증상들을 마치 실제인 것처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CFS의 근원을 정말로 심리 사회 병리학적인 데서 찾을 수 있다면, 이는 ‘역(逆)플라시보 효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존재하지 않는 치료가 효능이 있다고 생각해 마음이 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질병이 진짜 질병이라고 생각해 마음이 몸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환자 권익 운동을 정의하는 특징은 기성 의료계에 도전하기 위해, 또 때로는 과학 연구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기 위해 의료와 과학의 전문 용어들에 충분히 정통하려는 시도들이다. 그렇다면 일반인이 과학자 되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과연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을까? 알려진 사례들 중에는 일반인들이 특정 영역에서 자신이 겪은 경험으로 인해 과학자나 의사 들이 쉽게 획득할 수 없는 전문성을 지니게 된 경우도 있다. 브라이언 윈은 체르노빌 사고의 방사능 낙진에 대해 영국 컴브리아 지방의 목양농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연구했는데,이 사례에서 농부들은 자신이 보유한 농지의 생태와 양의 행동에 관해서는 전문가들이었다.환자들 역시 전문성을 지니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자신의 증상을 알고 있고, 자기 몸이거쳐 온 이력을 알고 있으며, 어떤 치료가 잘 듣는지를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자신의 질병을 지역적인 원인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환자들은 의료 기술을 사용하고 혈압계, 혈당 측정기 등과 같은 기기들에서 나온 수치를 해석하는 데 전문가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또한 의사와 치료계획을 협상하고 어떤 의사가 환자에게 동조적일 가능성이 큰지를 평가하는 데도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의사들이 특히 그들의 작업 환경 속에서 체계적으로 간과하기 쉬운 새로운 증상과 원인들을 지적하는 중요한 역할을 환자들이 때때로 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그러나 이처럼 의문의 여지없이 정당하고 종종 인정받지 못한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환자들이 우리가 이 장에서 다룬 질병 증상들의 실재성을 숙고할 때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조금 다른 종류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환자들이 주관적으로 자신의 증상에 대해 알고 그것이 진짜라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질병의 복잡한 병인학과 역학에 관해 발언할 자격을 갖출 수 없다. 이는 마치 자동차 사고의 피해자가 자동차 안전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질병을 내부로부터 아는 것은 분명 통찰력을 제공하고 환자들과 공감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또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배우고 더 많은 연구가 이뤄지도록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려는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에이즈 활동가들의 행동이나 로렌조 오일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의료 과학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역학, 약학, 생리학 연구를 대신할 수는 없다.

환자들, 혹은 그들이 더 선호하는 표현으로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people with AIDS)”은 의사-환자 관계를 재협상해 좀 더 동등한 파트너십으로 바꿔 놓았다. 활동가들이 성공을 거둔 것은 그들이 뭔가 내놓을 진정한 전문성을 가졌고 그런 전문성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먼저 그들은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이 어떤 요구를 갖는지를 오랫동안 경험함으로써 피험자들이 연구에 등록하는 이유와 함께 어떻게 하면 그들이 프로토콜에 잘 따르도록 설득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과학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자신들의 경험을 임상 시험의 표준 방법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판을 과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조화하여 제시함으로써 과학자들이 답변을 내놓도록 강제했다. 이는 『확대된 골렘』에서 논의된 컴브리아 지방의 목양농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활동가들이 우려를 제기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일부 생물 통계학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거의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는데, 이 점에서 활동가들은 운이 좋았다.활동가들과 과학자들 간의 조우에서 가장 매혹적인 측면 중 하나는 쌍방 모두가 내놓은 것과 얻은 것이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활동가들은 임상 시험의 세부 사항에 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되면서, 특정한 상황에서 플라시보 연구가 왜 가치 있는 것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1991년에 있었던 패널 토론에서 에이즈 활동가인 짐 에이고는 애초에 자신은 플라시보가 필요하다고 전혀 생각지 않았지만, 지금은 특정한 상황, 가령 단기간의 임상 시험을 통해 중요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빨리 얻을 수 있는 경우에서 플라시보를 이용하는 것의 가치를 인정한다고 시인했다. 일반 시민들은 배관, 목공, 법률, 부동산 등에 전문성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과학 기술에서 적어도 일부 영역에 대해서는 전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부 영역에서 그들은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보다 실제적으로 중요한 경험들을 이미 더 많이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그러한 전문성을 전문성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에이즈 활동가들이 성취해낼 수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었다.

심폐 소생술-죽음에 저항하기종교가 지배했던 시기에 죽은 사람을 도로 살리는 것은 바로 신(神)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인간들이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죄를 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개입은 신의 개입을 대체해 왔다. 인생의 여정에서 최종적이면서 되돌릴 수 없는 관문이었던 죽음은 점차 인간의 힘으로 조금 비켜갈 수 있거나 늦출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다. 소생술의 역할을 이해하려면 ‘임상적 죽음’과 ‘생물학적 죽음’을 구분해야 한다. 임상적 죽음이란 혈액 순환이나 호흡 등이 중단된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생물학적 죽음은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비가역적 퇴화를 의미한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이 소생술이 작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낸다. 그러한 간극을 창출하고 행동으로 이를 메우려는 최초의 체계적인 노력이 시작된 것은 18세기경의 일이었다.1767년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익사자 소생을 위한 협회를 창립했는데, 이 협회는 4년 만에 150명의 생명을 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로부터 7년 후 영국에서는 외견상 사망자를 위한 왕립 인도주의 협회가 창립되었다. 흉부 압박이 혈압을 높여 심장이 정지된 환자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여 준 사람은 대학원에서 연구 조수로 있던 가이 니커바커였다. 1958년 7월에 그는 당시 쓰이던 휴대용 제세동기의 7킬로그램짜리 무거운 노(櫓)를 가지고 개에게 실험을 하다가 혈압이 상승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웃 실험실에 있는 연구자의 도움을 얻어, 심장이 정지된 또 다른 개를 심장 압박을 통해 8분 동안 살아 있게 하는 데 성공했다.수술 도중에 마취제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로 인해 심장이 정지하는 사고가 때때로 일어나곤 했는데, 당시 쓸 수 있었던 유일한 대응책은 재빨리 환자의 흉부를 절개한 후 손으로 심장을 직접 마사지하는 것뿐이었고 항상 합병증을 유발해 대개 심각한 감염으로 이어졌다. 주드는 우연한 기회에 새로운 기법을 시험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쓸개 수술을 받으러 수술실에 들어온 한 여성 환자가 예기치 않게 심장이 정지하는 사고가 생긴 것이다. 그는 두 손을 환자의 가슴 위에 얹고 외부 심장 마사지를 시작했다. 극적인 2분간의 마사지 후에 맥박이 다시 뛰기 시작했고, 자연스럽지만 얕은 호흡도 돌아왔다. 이 환자는 결국 완전히 회복했고, 이 과정에서 인공 호흡은 전혀 쓰이지 않았다. 이는 소생술 연구에서 이제까지 있었던 가장 중요한 변화들 중 하나였다. 의미했다. 이는 심장 소생술로의 전환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이전까지는 환자를 소생시키는 것이 먼저 폐의 기능을 되살리는 것을 의미한다는 가정이 지배적이었다.) 소생술이 보편적 중요성을 지닐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소생술은 누구나, 어디에서나, 어떤 종류의 환자에 대해서나 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익사 희생자나 특정한 상황 하에서 외견상 죽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죽어 가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할 수 있었고, 여기에는 이전이라면 희망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을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이는 사망 과정에 대한 새로운 임상적 정의를 의미했다. 맥박이 멎은 것은 더 이상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없었다. 맥박은 다시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후 CPR에 대한 대규모의 인적·물적 자원 투자, 그리고 이와 연관된 응급 의료 시스템의 재조직화에 비추어 볼 때, 당시 예상했던 생존율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소생률의 편차가 심하고 대다수 지역에서 그 수치가 실망스러울 정도로 낮으며 생존한 사람들의 삶의 질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왜 CPR의 효능을 계속 믿어야 하고 그토록 많은 자원을 CPR에 투입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에 대한 답은 현대 의료와 그에 수반된 모든 불확실성을 포함한 실행에 대한 믿음, 그리고 죽음과 사망 과정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태도가 합쳐진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죽음의 검은 문을 피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원천으로서 의료를 필요로 한다. 설사 의료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실제로는 아주 적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저자들은 과학 기술에 속하는 전문성을 바라보듯이 의료를 전문성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의료 지식의 정의에서부터 시작해서 의료 지식과 과학 지식과의 관계, 의료 지식 확실성과 신뢰도 등을 따져보는 분석은 그 모든 불완전성과 불명확성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선택하는 좀 더 큰 그림의 일부분이 된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5
서문 7
서론 과학으로서의 의학과 구원으로서의 의료 19
1장 │ 플라시보 효과 의학의 심장부에 뚫린 구멍 41
2장 │ 가짜 의사 현장에서 진짜로 가장하기 63
3장 │ 편도 절제 수술 진단과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97
4장 │ 비타민 C와 암 대체 의료와 소비자의 문제 127
5장 │ 만성 피로 증후군 존재하지 않는 질병의 침투 163
6장 │ 심폐 소생술 죽음에 저항하기 181
7장 │ 에이즈 활동가 일반인 전문성의 미래 219
8장 │ 백신 접종 개인과 공동체의 긴장 257
결론 닥터 골렘 바로 보기 289
주(註) 313
참고 문헌 325
옮긴이의 글 의학과 의료를 보는 안목 넓히기 331

작가 소개

해리 콜린스

카디프 대학교 사회학과 석좌 연구 교수이자 지식전문성과학 연구 센터 소장으로 있다. 바스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1980년대 초에 상대주의의 경험적 프로그램(Empirical Program of Relativism, EPOR)을 제창해 에딘버러 대학교의 배리 반스, 데이빗 블루어 등이 주도한 지식사회학의 강한 프로그램(Strong Program)과 함께 과학지식사회학의 이론적 조류를 이끌었으며,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이른바 ‘과학전쟁(Science Wars)’에서도 주요 논객으로 활동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전문성과 민주주의의 문제로 관심의 폭을 넓히고 있다. 저서로는 골렘 시리즈 외에 『변화하는 질서(Changing Order)』(1985년), 『인공 전문가 (Artificial Experts)』(1990년), 『중력의 그림자(Gravity’s Shadow)』(2004년), 『전문성에 대한 재고(Rethinking Expertise)』(2007년, 로버트 에반스와 공저) 등이 있으며, 편집한 책으로 『하나의 문화?(The One Culture?)』(2001년, 제이 라빙거와 공편) 등이 있다.

트레버 핀치

코넬 대학교 과학기술학과와 사회학과 겸임 교수이며, 바스 대학교에서 사회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요크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쳤다. 위비 바이커와 더불어 EPOR을 기술사회학에 접목한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y, SCOT)을 제안했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기술사회학에서 사용자(user)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저서로는 해리 콜린스와 공동 저술한 『골렘(The Golem)』(1993)과 『확대된 골렘(The Golem at Large)』(1998년) 외에 『자연과의 대면(Confronting Nature)』(1986), 『아날로그 시절(Analog Days)』(2002년, 프랭크 트로코와 공저) 등이 있고, 편집한 책으로 『사용자가 왜 중요한가(How Users Matter)』(2003년, 넬리 오드쉰과 공편) 등이 있다.

이정호 옮김

영국 노팅험 대학교 의학 대학원에서 인간분자유전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 의학 대학원 베스이스라엘디커니스 의료원 심장 연구부와 삼성 생명 과학 연구소 유전체 연구 센터를 거쳐 고려 대학교 환경 생태 연구소와 차의과대학 기초 의학 연구소 선임 연구원으로 있다. 지은 책에 『생명, 인간의 경계를 묻다』(공저), 『숲이 희망이다』(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에 『유전자, 사람, 그리고 언어』가 있다.

김명진 옮김

서울 대학교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 철학 협동 과정에서 미국 기술사를 공부했다. 성공회 대학교와 서울 대학교에서 ‘과학기술과 사회’ 등의 과목을 강의하면서 시민 과학 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대중과 과학기술』(편저), 『야누스의 과학』, 옮긴 책으로 『인체 시장』(공역), 『디지털 졸업장 공장』 등이 있다.

독자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