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곤충에서 자연의 비밀을 그려낸바로크 시대 곤충화가 마리아 메리안의 일생
그녀의 그림은 감각적인 즐거움과 지적 쾌감을 완벽하게 만족시켜 준다.-요한 볼프강 괴테
여신 미네르바에게 재능을 바친 여인-요아힘 폰 잔드라르트(바로크 시대 독일의 미술사가, 화가)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년)을 비롯한 중세, 근대의 여성들은, 남성 중심적 신분 사회에 갇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뛰어난 예술적, 학문적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설씨 부인, 장씨 부인처럼 아버지가 물려 준 성 말고는 이름도 없이 역사의 변두리에 방치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날 그들을 재조명하는 일조차 기초 자료가 너무 부족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남아 있는 작품들조차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한갓 여성의 여기(餘技)로 치부되고 있다.
이런 우리의 상황을 고려할 때, 1980년대부터 독일에서 본격적으로 재조명돼, 지폐와 우표에까지 그 얼굴이 실린 여류 곤충학자이자 동판화가인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Maria Sibyla Merian, 1647∼1717년)의 삶과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은 타산지석이 될 만하다.
마리아 메리안은, 여성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던 바로크 시대 독일에서 동판화 제작자이자 출판업자로 활약했던 마테우스 메리안의 딸로 태어나, 곤충의 변태 과정과 생태를 생생하게 묘사한 동판화로 당시 막 태동하기 시작한 곤충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녀는 이복형제들의 냉대와 육아와 난봉꾼 남편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출판 공방을 경영했고, 곤충의 생태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했으며, 개성 넘치는 동판화 화풍을 확립했다.
작고 어두운 규방을 벗어나 독일과 네덜란드의 대자연, 그리고 머나먼 남아메리카 수리남의 정글 속에서 그녀가 가느다란 동판화용 조각침으로 건져 올린 곤충과 식물 들의 생태와 모습은, 곤충이 알, 애벌레, 번데기, 성충으로 변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갑자기 생긴다고 믿었던 당대 사람들의 무지를 깨뜨렸다. 그녀의 그림들은 그대로 현대 곤충 도감의 원형이 되었다.
파란만장한 마리아 메리안의 일생과, 치밀한 과학적 관찰과 감각적인 예술이 어우러진 그녀의 작품을 하나로 엮은, 나카노 교코[中野京子]의 『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원제: 情熱の女流「昆虫画家」)』는 한 여성의 불굴의 의지와 열정에 주목한다. 독문학을 전공했고 독문학과 독일 문화를 일본에 소개해 온 저자 나카노 교코는 남성 중심적 과학자 사회와 엘리트주의적 예술사에서 무시되다가 최근에 재조명되기 시작한 마리아 메리안의 생애와 작품을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되살려 냈다.
박물학과 수집광의 시대
마리아 메리안은 30년 전쟁이 끝나기 바로 전해인 1647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전후 피해 복구와 함께 시작된 독일 바로크 시대와 마리아 메리안의 생애는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바로크 시대의 사람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조화미에서 벗어나 신기함, 특별함, 화려함을 추구했다.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을 가진 ‘바로크 시대’라는 말은 18세기 고전주의 시대의 사람들이 그 시대를 경멸해 부른 이름이었다. 그녀는 ‘보고 싶고, 알고 싶고, 갖고 싶다.’라는 모토를 내건 바로크 시대의 공기를 마시며 살았다.
대항해 시대와 신대륙 발견의 시대가 마무리되고 서구 제국의 식민지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식민지의 진기한 물품이 유럽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일찍 자본주의가 도입된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수집 열풍이 유럽을 휩쓸었다. 회화 작품은 물론, 로마 황제의 흉상, 자동인형, 터키의 활, 일본의 갑옷과 투구, 중국의 찻잔, 각국의 민속 의상, 고서, 박재 같은 생물 표본, 심지어는 사람의 기형 손가락까지 수집 대상이 되었다. 시민 계급이 성장함에 따라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던 미술 작품은 어느새 평범한 시민 가정의 장식품으로 변해 갔고 그 속에서 정물과 풍경을 담은 동판화의 수요 또한 급증했다.
정열의 곤충화가
마리아 메리안은 당시 유럽의 도시 풍경을 동판화로 옮겨 인기를 끈 「도시 동판화」 시리즈의 작가인 스위스 출신 독일 동판화 제작자 마테우스 메리안의 딸로 태어났다. 후처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이복형제들의 냉대 속에서 자라야 했다. 형제자매와 잘 어울리지도 못했고 친구도 없던 내성적인 마리아 메리안은 꽃과 나비 같은 자연을 관찰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18세의 나이에 젊은 뉘른베르크 출신 동판화가 요한 안드레아스 그라프와 결혼한 마리아 메리안은, 1675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과 어린 시절의 경험을 십분 살려 꽃을 소재로 한 동판화집 『꽃 그림책』 시리즈를 만들었다. 그녀는 첫 번째 책의 성공 이후, 1679년 그때까지 체계적으로 축적해 온 곤충 관찰 성과를 모아 『애벌레의 경이로운 변태와 그 특별한 식탁』을 펴냈다.
그녀의 화집은 처녀작이었던 『꽃 그림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단순한 감상용 화훼화가 아니라 최신 곤충학, 박물학 정보를 담은 일종의 보고서였다. 그녀의 동판화들은 그때까지 화훼화의 여백을 장식하던 곤충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곤충이 알, 애벌레, 번데기, 성충으로 변태해 가는 모습과 그 애벌레가 주로 먹는 식물을 하나의 화폭에 담은 동판화들로 이루어진 그 책은, 곤충은 썩은 물건에서 자연적으로 생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발생설’을 공격하고 곤충의 변태 과정을 해명해 ‘곤충학의 원조’로 평가받는 스왐메르담의 학설을 확증해 주는 자료이자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그녀는 이 책 속에서 애벌레의 변태와 생태는 물론,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기생벌의 존재를 기록해 곤충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가사와 공방 운영, 학문 연구와 예술적 작업을 동시에 해냈던 그녀는 독일 미술사가 잔드라르트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와 명사 들의 상찬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대했지만, 일은 하지 않고 술과 여자에 빠져 있던 남편과의 갈등 때문에 그녀는 연구 활동과 작품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이혼과 은거, 그리고 독립
마리아 메리안은 의붓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홀로 된 어머니와 두 딸을 데리고, 남편 그라프의 손에서 벗어나, 기독교 경건주의 운동의 분파 중 하나인 라바디 파의 수도원 코뮌에 들어갔다. 그리고 코뮌이 붕괴할 때까지 5년 동안 그 속에서 생활했다. 네덜란드 프리슬란트 발타 성에 있던 라바디 파의 코뮌은 그녀에게 새로운 활동을 위한 휴식과 수리남 열대 곤충들과의 만남을 제공했다. 라바디 파 발타 성 코뮌의 강력한 후원자이자 발타 성의 영주였던 수리남의 총독 솜멜스다이크는 남아메리카 수리남의 신기한 문물을 발타 성으로 보내 주었고, 그중 신기한 남국의 곤충 표본들은 마리아 메리안의 연구열을 자극했다.
경건주의 운동의 퇴조와 솜멜스다이크 같은 후원자의 사망으로 라바디 파 발타 성 코뮌은 붕괴되었다. 코뮌을 떠난 마리아 메리안은 암스테르담에서 두 딸과 함께 출판 공방을 열어 이혼과 은거로 잠시 미뤄 두었던 연구와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그녀는 레벤후크를 비롯한 당대의 명사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장인이자 연구자로 자립했다.
정글 속의 곤충학자
암스테르담에 정착해서 안정된 삶을 꾸려가던 그녀는 52세라는 노년의 나이에 남아메리카의 수리남으로 친척과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연구와 작품 활동을 위해 떠났다. 처음 겪는 열대의 더위와 말라리아에 시달리고, 같은 네덜란드 출신 식민지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의 몰이해와 싸워 가면서 열대 곤충과 식물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과 경험을 모두 살려 신들린 듯이 연구와 스케치에 몰두했다. 그녀는 2년 가까이의 연구를 통해 수백 점의 스케치와 표본을 만들었고 유럽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수많은 곤충과 식물을 분류했다.
『수리남 곤충의 변태』
수많은 표본과 연구 성과를 안고 화려하게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스케치와 표본들을 이용해 동판화 작업에 몰두했고, 5년 만인 1705년에 수리남 곤충의 신비를 담은 동판화집 『수리남 곤충의 변태』를 완성했다. 당대 최고의 동판화 제작자들을 모아 최고의 재료를 사용해 만든 그녀의 동판화집에는 열대의 뜨거운 정열과 놀라운 곤충학적 정보가 담겨 있었다. 새를 공격하는 타란툴라거미나 제비 알을 노리는 보아뱀의 그림처럼 생존 경쟁을 다루는 그림에서부터 애벌레의 내부 구조를 뢴트겐 사진처럼 보여 주는 그림에 이르기까지 60여 장의 동판화를 통해 그녀는 탁상공론 수준에 머물러 있던 유럽 곤충학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녀의 동판화집은 레벤후크를 비롯한 학자나 곤충 수집가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에서 일반인들까지 매료시켜, 유럽 각국의 궁전, 도서관, 박물관, 상류층의 응접실을 장식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역시 그녀의 그림을 구해 궁전에 렘브란트 그림과 나란하게 걸어 감상했다고 한다.
죽음, 그 후
이렇게 마리아 메리안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그녀의 삶과 업적은 그녀의 죽음과 함께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딸 중 큰딸 헬레나는 어머니 마리아 메리안의 연구를 이어받아 수리남으로 떠났지만 마리아 메리안의 사후 실종되었다. 둘째 딸 도로테아도 남편과 함께 표트르 대제의 궁전 화가로 초빙되어 네덜란드를 떠났다. 수학자 오일러와 결혼한 마리아 메리안의 손녀 잘로메를 제외하고, 그녀의 후손들은 기록에서 사라져 갔다.
18세기 이후 형성되기 시작해 바로크 시대의 박물학을 대체한 남성 중심적인 근대 곤충학과 분류학은 분류학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대에 연구를 했던 그녀의 실수를 치명적인 오류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곤충학자와 분류학자들은 그녀의 작업을 평가절하하며 곤충학의 계보에서 제외해 버렸고, 동판화나 정물화를 유채화나 역사화보다 낮게 평가했던 예술사가들은 동판화 작가였던 그녀를 회화사의 계보에서 누락시켜 버렸다. 과학과 예술, 두 분야를 동시에 추구했던 그녀는 시대의 흐름 변화에 따라 두 분야에서 동시에 버림받았으며, 일반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마리아 메리안의 동판화들이 가진 학문적 가치와 그녀의 정열적인 삶은 이렇게 잊혀져 갔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그림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았다. 그녀의 『꽃 그림책』, 『애벌레의 경이로운 변태와 그 특별한 식탁』, 『수리남 곤충의 변태』는 『꽃 그림책』의 초판이 출간된 1675년부터 1775년까지 100년 동안 당시로서는 놀라운 숫자인 19쇄나 발행되었다. 그 후 18∼19세기에도 끊임없이 중판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도 현대어로 번역된 책들이 여럿 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배경으로 독일에서 마리아 메리안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워낙 오랫동안 잊혀졌던 탓에 그 성과는 아직 미흡하다. 뛰어난 동판화가였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곤충학의 선구자였다는 것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또 둘째 딸 도로테아와 함께 러시아로 건너간 마리아 메리안의 미출간 원화들 역시 공개되지 않은 채 묻혀 있다. 저자 나카노 교코는 러시아, 독일, 네덜란드, 일본의 국회 도서관 등 수많은 곳을 직접 탐방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과학과 예술이 결합된 독특한 장르를 창조해 낸 마리아 메리안의 삶과 업적을 그려낸다.
치밀한 과학 연구와 섬세한 장인 정신으로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은 창조적 여성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남성 중심 사회에 가둬 둘 수 없었던 마리아 메리안의 자유분방한 정열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한 여성의 삶을 복원하는 이 책은 수많은 제약 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아로 ‘변태’하기를 꿈꾸는 현대인에게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머리말
제1장 프랑크푸르트
제2장 뉘른베르크
제3장 네덜란드
제4장 수리남
제5장 다시 암스테르담
메리안 연보
책을 마치면서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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