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담장 속에 과학이 있었다
부제: 과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인의 의식주
글 이재열
출판사: 사이언스북스
발행일: 2009년 3월 10일
ISBN: 978-89-8371-028-4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45x120 · 240쪽
가격: 15,000원
분야 과학사·과학철학
수년 전 “우리 것은 좋은 것이다.” 하는 광고 카피가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 것이 왜 좋은지’, ‘어떻게 좋은지’, 그리고 ‘무엇이 우리 것인지’ 물었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급격한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전통 문화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마을을 단위로 사회를 구성하지 않으며, 흙으로 지어진 집 속에 살지 않으며, 자연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실과 재료로 만들어진 옷과 먹을거리로 살아가지 않는다. 서울 강남 사는 아이들이 시골 마을에 가면 이국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지 않는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전통 문화와 전통적인 삶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고 있다. 한옥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 북촌을 중심으로 현대적 한옥을 새로 짓거나 기존의 한옥을 개량하는 사업이 붐을 일으키고 있고, 아토피와 불량 식품에 불안해 하는 부모들이 전통적인 소재나 천연 재료로 만들어지는 옷과 먹을거리를 찾아 아이들에게 주고 있다.
‘근대화’, ‘잘살아 보세’ 같은 구호 아래 눌려 비과학적, 비위생적, 비현대적인 것으로 백안시당했던 전통 문화 속에서 과학적, 위생적, 도시 문화의 그 어떤 것보다도 현대적인 지혜로 가득한 ‘전통 문화의 지혜’를 발견하려고 하는 시도는 서구 문화와 과학의 본격 수입이 100여 년이 된 현재 시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주)사이언스북스에서 펴낸 이재열 경북 대학교 교수의 『담장 속의 과학』은 과학자의 눈으로 전퉁 문화의 지혜를 읽어 낸 보기 드문 책이다. 물론 현대의 전문 연구자들의 전통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 사례는 여럿 있다. 서울 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전통 생태학’ 모임이나 건축학계의 일부 진영에서 추진되고 있는 한옥과 전통 마을에 대한 심화된 연구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생태학이나 건축학 전문가들 사이에서나 진행되고 있는 논의를 알기 쉬운 언어로, 대중의 눈높이에서 전통 문화의 지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전통 속의 과학과 생태학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고 있다.
독일의 기센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의 대표적인 과학 연구 기관인 막스 플랑크 생화학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현대 대구에 소재하고 있는 경북 대학교 생명과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저자 이재열 교수는 국내 교양 과학 독서계에서는 미생물학의 소개자로 이름 높다. 국내에 미생물학의 이모저모를 소개한 책으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던 『보이지 않는 권력자』를 저술하고, 미생물학사의 전반과 인류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끼친 미생물들에 대한 소개를 담은 미생물학 교양서의 고전 『미생물의 힘』을 번역함으로써 한국 독서계에 미생물의 존재를 널리 알린 바 있다. 이번에는 미생물을 탐구하던 그 현미경 같은 시선을 전통 문화에 돌려 그 안에 숨어 있는 과학을 탐색한다.
이재열 교수는 생물학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으로, 20년 넘게 전통 문화에 관심을 갖고 우리 역사와 문화의 현장을 찾아 그 흔적을 더듬어 왔다. “자연 과학자는 자연 과학의 한계 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인문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는 독일 유학 시절 지도 교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문화의 깊은 이면을 들여다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저자는 역사 탐구의 성과 중 일부를 모아 지난 2004년 『불상에서 걸어나온 사자』라는 책을 출간한 적도 있다. 전통 불상, 탱화, 그 외 수많은 조각상에서 발견되는 사자와 해태 같은 한반도에서 접할 수 없거나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없는 동물들의 형상이 어떻게 한국인들과 만나게 되어 우리 문화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는지 살핀 이 책은 자연 과학과 인문 과학의 독특한 만남으로 출간 당시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과학이나 생태학에 대한 자식이 없었어도 생활 속에서 미생물의 힘과 자연의 변화를 조화롭게 사용할 줄 알았던 조상의 지혜를 한국의 전통적인 의식주 문화에서 찾아 담은 책이다.” —《서울신문》
책머리에.담장 속의 과학을 찾아서 … 5
1부 마음속에 품은 집
옛마을 찾아가는 길 … 20
고샅길을 걸으며 … 32
나무를 심는 마음 … 42
집이 살아 숨쉰다 … 50
생각만 해도 좋은 집 … 60
나무와 흙과 짚의 어우러짐 … 69
사랑스러운 사랑채 … 78
난방과 취사가 만나는 온돌 … 88
부엌에는 신(神)이 사신다 … 97
마당의 원리 … 105
안주인의 그림자 … 119
화장실에서 보는 세상 … 124
정신 건강에 맞는 집을 찾아서 … 134
2부 우리 몸을 채우는 먹을거리
김치를 맛보며 미생물의 힘을 느끼다 … 148
미생물과의 끝없는 전쟁 … 153
우리 음식의 농익은 맛과 간 … 160
김치의 재발견 … 168
음식의 갈무리 … 177
3부 우리 몸을 감싸안는 옷
빨래에 대한 짧은 고찰 … 192
색깔 있는 옷 … 201
속옷은 기능성이다 … 210
자연으로부터 얻은 옷감 … 217
책을 마치며 … 227
더 읽을거리 … 235
찾아보기 … 238
이번에 출간된 『담장 속의 과학』은 전통 문화에 대한 저자의 관심이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의식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 주는 책이다. 이재열 교수는 여기에서 전통 문화의 지혜를 ‘담장 속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애매하게 ‘전통 속의 지혜’, ‘우리 것’이라고 불리던 것에 이름을 붙여 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서양 과학과 대등한 ‘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연구하자고 제안한다.
앞마당과 뒷마당의 온도차를 이용한 대청마루의 통풍 구조, 전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난방 구조물이지만 다른 어떤 난방 장치보다 탁월한 난방 성능을 자랑하는 온돌의 구조, 미생물과의 공존의 기술을 터득하지 않는 한 만들 수 없는 간장과 된장 그리고 김치 같은 다양한 발효 식품들, 누에 같은 동물에서 목화 같은 식물까지 자연의 온갖 산물들을 실로, 천으로 만든 대담한 직조 기술들을 봤을 때, 수천 년의 역사가 누적된 전통 문화의 지혜들을 과학 그 자체로 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정량화, 수식화 같은 현대 과학의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부족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량화, 수식화 등으로 계량할 수 없는 거대한 과학적 지혜가 전통적 삶의 지혜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현대적 기준으로 봤을 때 모자란 부분은 비판할 것이 아니라 현대 과학의 성과를 이용해 보강함으로써, 서구 과학만으로는 완전하게 해결할 수 없으며, 아무리 근대화되었다고는 해도 결코 없앨 수 없는 우리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완전한 ‘담장 속의 과학’으로 발전시키자는 게 저자의 핵심 주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자는 “담장 속의 과학은 담장 밖의 과학과 만나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의 이 주장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부분은 전통 가옥에서 부엌의 구조를 분석한 부분이다. 계급에 따라 사람을 상하로 나누는 신분제와 성별에 따라 사람을 남녀로 구분하는 내외 문화에 지배를 받은 조선 시대의 건축물들을 분석하면서 이재열 교수는 부엌에 관심을 돌린다. 부엌에 여성인 안주인이 주재하는 안채와 남성인 바깥주인이 주재하는 사랑채를 공간적으로 연결하는 역할과, 집안의 대소사를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안주인의 자신의 리더십을 최대한 발휘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과, 조리 기능과 난방 기능을 겸하는 아궁이를 두어 실생활의 핵심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부여함으로써 문화적 기능과 실용적 기능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게 한 것은, 현대 건축학의 개념을 뛰어넘는 지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또 문화성과 실용성을 적절하게 결합한 전통 건축의 설계를 적절하게 응용한다면 현대인이 획일적인 아파트 건축 구조 속에서 겪고 있는 다양한 심리적, 육체적 현대병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제안이다.
몸에 좋다던 음식이 오히려 건강을 위협하고, 몸을 보호하는 의복이 피부 질환을 일으키고, 첨단 아파트에서 독성 물질이 뿜어져 나오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자연과 함께 어울려 살았던 전통 문화의 지혜는 소중할 수밖에 없다.
전통 문화에 대한 따스한 관심을 가진 과학자가 전통 문화를 탐구하며 읽어 낸 지혜들을 편안한 에세이에 엮어 펴낸 이 책은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한국인의 의식주에 녹아 있는 삶의 지혜를 과학의 눈으로 읽어 내는 법을 가르쳐 준다. 현미경으로 미생물의 꼬물거리는 움직임을 추적하던 눈으로 문설주에 박힌 작은 장식에서 깊은 맛을 우려내는 장독대까지 우리의 의식주를 섬세하게 살피는 생물학자의 이 책은 전통의 삶과 그 시공간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