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생물학과 사회 생물학을 둘러싼
‘유전자 전쟁’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꿔 놓았는가?
한 생물학자의 회고를 통해 보는 한 과학의 진화 과정
세계는 바야흐로 유전자 조작과 쟁탈 시대에 돌입해 ‘유전자 전쟁’이 시대의 특성을 이루고 있다. 나는 지난날에 톡토기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 생물의 여러 가지 형태적 형질의 변이, 거대 염색체의 다형 현상, 집단 동태, 탈피 주기, DNA 상의 변이성 등을 조사, 분석, 관찰했다. 결국 이 유전자들의 발현 결과로 나타나는 표현형)과 행태를 계통분류학적으로 분석, 관찰함으로써 진화의 작동과 증거를 관찰한 셈이다. 이러한 바탕은 진화생물학의 최신판이면서 ‘이기적 유전자’로 상징되는 사회생물학을 공부하고 번역하며 강의하는 데로 연결되었고 이는 나에게 생명 현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과 지평을 열어 주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부족하게나마 ‘유전자의 궤적’을 따라 공부하고 연구한 셈이다
이 책은 이 궤적을 따라 걸으며 내가 보고 듣고 읽고 성찰한 유전자 전쟁의 현대사를 나 나름대로 회고한 것이다. 하나의 학문이 나서 자라고 한 지식 생태계에서 다른 지식 생태계로 전파되고 적응하고 진화하는 과정을 나름 목격한 역사인 셈이다. 필자의 회고 속에서 이 역사를 읽어 내 주는 눈 밝은 독자가 있다면 글쓴이로서는 지복(至福)이라 느낄 것이다. -본문에서
“결국 오늘의 사회 생물학은 특히 신경 생물학과 분자 유전학 등의 동참과 지지 속에서 인류의 자아 인식과 자기 구제의 마지막 희망으로까지 기대되고 있다. 바로 인간의 진화 생물학적 뿌리와 변천 과정을 이해하지 않고는 오늘날 지구를 멸망으로 몰고 있는, 인간의 자기 제어 능력 상실로 인한 모순적 파괴 행태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생물학이 옥스퍼드와 보스턴에서 횃불을 켠 지도 20여 년이 지났음에도 우리나라엔 무풍 지대의 정적이 있을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사회 생물학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국내 과학 교양서라고 할 『유전자들의 전쟁: 행동으로 본 사회 생물학의 세계』(민음사, 1994)를 펴내며 그 서문에서 이병훈 전북 대학교 교수는 사회 생물학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유전자의 관점’이 결여된 한국 사회의 지성계를 질타했다. 그리고 사회 생물학의 적극적인 도입을 제안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났다. 이제 ‘유전자의 관점’에서 생명 현상뿐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현상까지 해석하는 사회 생물학(Sociobiology)과 진화 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이 시민권을 얻어 우리 사회 지식 문화의 한 축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사회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의 개념과 원리 들은 남녀 간의 사랑 문제를 다룬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인간 본성에 내재된 폭력에 대해 논쟁하는 학술 회의장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
이번에 (주)사이언스북스에서 펴낸 이병훈 전 전북 대학교 생물과학부 교수의 『유전자 전쟁의 현대사 산책: 한 생물학자의 회고』는 한 생물학자의 회고를 통해 사회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이라는 젊은 기초 과학 분야가 우리 사회에 전파되고, 진화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 책의 강점은 치밀함이다. 톡토기 연구에서 한국 최고 권위자인 저자가 톡토기를 연구하며 얻은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적인 결론이 정리되어 있다.” —《동아사이언스》
톡토기 연구의 한국 최고 권위자
저자 이병훈은 전북 대학교 생물과학부 교수를 지냈고, 현재 원로 과학 기술자들의 전당이라 할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종신 회원이다.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동물 생리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 대학교에서 곤충 계통 분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특히 톡토기처럼 지중 곤충의 계통 분류학적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뿐만 아니라 동굴 생물학, 무시류 곤충학, 분지 계통학 분야에서도 우리 학계의 척박한 연구 수준을 국제적으로 대등하게 끌어올린 업적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톡토기의 경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북한, 태국, 대만의 톡토기들을 연구해 100개의 신종, 2개의 신속, 1개의 신아과 및 1개의 신과를 창설했다. 이 공로로 하은(夏隱)생물학상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우수 논문상 등을 수상했다.
또한 생물 다양성(biodiversty)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 생물 다양성 개념을 국내에 소개하고,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노력을 저극적으로 펼쳤으며, 미국 하와이 동서센터(The East-West Center), 프랑스 국립자연박물관 생태학연구소 객원연구원 등의 활동을 통해 자연사(natural history) 박물관의 중요성을 깨닫고 우리나라에서도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설립을 추진하기 위해 한국동물분류학회장, 한국곤충학회장, 한국생물다양성협의회장, 국립자연박물관 설립추진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역임하며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사회 생물학의 도입을 주도한 원로 생물학자
한국 생물학계의 대표적인 원로 학자 중 한 사람인 저자의 또 다른 공로는 한국 사회에 사회 생물학을 도입, 소개한 것이다. 저자는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 축약본(Sociobiology: abridged edition)』(전2권, 민음사, 1992)을 번역 출간해, 당시로서는 기초 생물학의 첨단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집단 생태학과 동물 행동학의 성과들을 하나로 아우른 사회 생물학을 국내 학계에 전면적으로 소개했다. 이것은 한국 지식 사회에 막 불기 시작한 진화 생물학 바람을 열품으로 진화시켰다.
1990년대 초반을 전후해서 한국 지식 사회에는 니콜라스 텐베르헌의 『동물의 사회 행동』(1991년), 『곤충의 사회 행동』(1992년), 콘라트 로렌츠의 『공격성에 관하여』(1986년),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1992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이용철 번역본, 1992년; 홍영남 번역본 1993년) 등이 출간되며 진화론을 둘러싼 관심이 커지고 있었는데, 대우학술총서 중 하나로 나온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 축약본』은 이런 흐름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논의의 수준을 새로운 국면으로 끌어올렸다.
사회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 등은 비교적 새로운 학문이다. 1964년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도널드 해밀턴이 혈연 선택(kin selection) 이론을 제창하면서 시작되었고, 하버드 대학교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이 이론을 원용해 『사회 생물학: 새로운 종합(Sociobiology: The New Synthesis)』을 펴내면서 널리 알려졌고, 학문 세계에서 선풍적인 논쟁을 일으켰다. 진화 심리학은 이 사회 생물학의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인지주의 심리학과 진화론을 결합해 만들어진 심리학의 새 분과이다.
“사회성을 나타내는 생물의 생물학적 기초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사회 생물학은 자연 선택의 단위가 개체가 아닌 유전자의 표현형이며, 개체는 유전자를 이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운반체에 불과하다는 소위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근거해서 생물의 이타성, 의사 소통, 텃세, 위계 질서, 계급, 성 선택, 부모의 자식 돌보기 등 일견 기존의 진화론으로는 설명 불가능해 보이는 사회성의 진화를 설명해 냈다. 그리고 이 같은 논지를 인간의 문화와 종교, 그리고 인간 자신의 사회에까지 확장해 생물학으로 인간의 사회 현상을 설명할 수 있으며, 언젠가 사회학과 심리학은 생물학의 한 분과 학문이 될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이것은 당연히 서구 학계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사회 생물학은 지금까지 학계 내외부의 수많은 학자들과 뜨거운 논쟁을 벌여 가며 발전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의 사회 생물학 논쟁은 윌슨의 책 출간 17년 후에 벌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나름 뜨겁게 전개되었다. 저자는 윌슨의 책을 번역 출간한 이후에도 《과학사상》을 시작으로 여러 학술지와 신문 등 대중 매체에 적극적인 칼럼 활동을 전개하며 생물학의 “첨단”을 적극 소개하고 이후 전개될 국내 사회 생물학 논쟁을 주도해 갔다. 사회 생물학이 유전자 결정론을 인간에게까지 안이하게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나 인간의 문화가 가진 특이성과 다양성을 유전 형질만으로 환원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 서구에서 전개된 다양한 논의를 참조, 소개하며 한국 사회에서의 논의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또한 신문 연재물을 엮은 『유전자들의 전쟁』을 출간하고, 에드워드 윌슨의 자서전인 『자연주의자』, 『개미 세계 여행』을 번역 출간함으로써 논의의 깊이 자체를 두텁게 만드는 데에도 공헌했다.
한 생물학자의 회고로 보는 한 과학의 진화 과정
이 책은 저자 이병훈의 「파랑(波浪)의 인생 회고 3부작」 3부작 중 두 번째 책이다. 파랑(波浪)은 저자의 아호다. 첫 번째 책은 『한국에서의 생물다양성과 국립자연박물관 추진의 현대사』(다른세상, 2013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2014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 학술 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이 책의 후속편인 이 책은 저자가 전공 분야 연구와 과학 문화 진흥 부분에서 밟아 온 인생 역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모두 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1장 「톡토기 다양성 연구」에서는 저자의 전공 분야인 톡토기의 연구의 제반 사정이, 2장 「유전자 전쟁의 현장, 사회 생물학」에서 한국 사회에 사회 생물학을 소개하고, 확산하며, 그 논쟁에 참여해 온 이력이, 3장 「가르치고 연구하며 함께 배운 시절들」에서는 지방이라는 척박한 연구 환경 속에서 인재들을 만나고 길러내며 학문의 발전을 위해 진력해 온 전북대에서의 교육 활동과 학회 활동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년 퇴임 이후의 연구 및 저술 활동 등을 다룬 4장 「정년 퇴임 이후에도 학문은 계속된다」, 5장 「생물학사상연구회와 관산곤충연구회 활동」에서는 원로 학자의 인생 회고와 학문 성찰을 맛볼 수 있다.
이 책의 강점은 치밀함이다. 저자는 곤충 계통 분류학자로서의 치밀함으로 자신의 삶을 살핀다. 자신이 어떤 연유로 톡토기를 연구하게 되었는지, 톡토기 연구 과정에서 어떤 방법론을 사용했고, 어떤 성과를 냈는지, 사회 생물학의 논쟁사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고,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연구와 논쟁을 따라잡기 위해 어떤 독서를 하고 어떤 글쓰기를 했는지 꼼꼼하게 기록하고, 치밀하게 분석하며, 생생하게 소개한다. 저자의 치밀한 필치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톡토기를 비롯한 지중 생물학 연구가 한국 사회를 비롯한 동아시아권 학계에서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갔는지, 사회 생물학 논쟁이 유전자 결정론을 둘러싼 1차 논쟁에서 유전자-문화 공진화를 둘러싼 2차 논쟁으로, 그리고 통섭(consilience) 논쟁으로 발전해 갔는지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개인은 역사를 살피는 현미경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삶을 곧바로 역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개인의 삶을 역사의 한 국면으로, 개인의 형태로 발현된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읽어 내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은 어떤 과정을 통해 발전하게 되는 걸까? 개인은 그러한 과정에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마 이 책은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한 생물학자의 삶을 통해 사회 생물학이란 젊은 학문이 한국 지식 사회라는 젊은 학계에 전파되고 정착하고 진화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될 것이다.
책을 시작하며 7
1장 톡토기 다양성 연구 13
2장 유전자 전쟁의 현장, 사회생물학 84
3장 가르치고 연구하며 함께 배운 시절들 168
4장 정년 퇴임 이후에도 학문은 계속된다 244
5장 생물학사상연구회와 관산곤충연구회 활동 294
책을 마치며 349
감사의 글 355
참고 문헌 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