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환 마마가 가장 두렵던 시절, 우리 의학 이야기

사람을 구하는 집, 제중원

조선, 새로운 의학을 만나다

박형우, 박윤재

출판사 사이언스북스 | 발행일 2010년 2월 1일 | ISBN 978-89-8371-115-1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48x220 · 336쪽 | 가격 15,000원

책소개

한국 현대 의학의 시원을 찾아서
호환 마마가 가장 두렵던 시절, 우리 의학 이야기

신종 인플루엔자 또는 신종플루 A(H1N1)는 2009년 멕시코에서 발생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집계에 따르면 2010년 1월 10일 현재 전 세계 신종 플루 사망자 수는 1만 3554명에 이른다.(보건복지가족부 발표 국내 사망자수 1월 2일 현재 192명) 20세기 초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낳은 스페인 독감의 재래라는 발생 초기의 우려와는 달리 적은 수의 희생으로 일단락된 듯하다. 예상보다 적은 이 희생자 수는 백신 개발과 다국적 제약 회사가 얽힌 음모론의 밑불이 되고도 있지만, WHO와 각국 보건 당국 그리고 시민들의 자발적 방역 활동의 성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방역 대책이 시행되었고 시민들은 집에서, 직장에서, 온갖 공공장소에서 손 씻기를 하고 마스크를 쓰는 등 자신의 몸을 지키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우왕좌왕하는 정부와 반대로 시민들은 일사불란하게 예방 지침을 따랐던 것이다. 콜레라를 호환이라고, 천연두를 마마라고 부르며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100년 전의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위생’ 시민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이러한 새로운 인간의 탄생 배경에는 서양 의학이 있다. 한말 처음 들어온 서양 의학은 조선 왕조를 끊임없이 괴롭힌 전염병에 소독과 청결이라는 새로운 대책을 마련해 주었고 전통 의학인 한의학을 대체했다. 한국인의 세계관뿐만 아니라 신체를 둘러싼 자의식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의료라는 잣대로 볼 때 한국의 근대화는 서양 의학의 토착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주)사이언스북스에서 펴낸 『사람을 구하는 집, 제중원: 조선, 새로운 의학을 만나다』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오랫동안 묻혀 있던 한국 근대 의학사 관련 사료들을 바탕으로 서양 의학의 한국 토착화를 추적한 책이다. 국내에서 근대 의학 관련 사료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연세 대학교 동은 의학 박물관 관장 박형우 교수와 연세 대학교 의사학과 박윤재 교수가 공저자로 나서 근대 의학사의 이모저모, 심지어는 그 이면을 소개한다. 두 사람의 저자, 해부학자 박형우와 역사학자 박윤재는 18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서양 의학의 수용 과정을 정리함으로써 서양 의학이 어떻게 우리 삶 속에 들어왔는지, 현재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집중 해부하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은 제중원을 공부하면서 제중원이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중원을 단순히 족보쓰기 차원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알아 나갔다. 제중원은 한국 근대 의학의 아버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한국 근대 의학의 역사를 호젓하게 음미하며 ‘산책’할 수 있는 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본문에서

최근 화제 속에 방영 중인 SBS 드라마 「제중원」은 갑신정변의 와중에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극적으로 소생시킨 서양 선교사 알렌의 청으로 고종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동은 의학 박물관 박형우․박윤재 교수는 제중원을 소재로 한 이기원의 소설 『제중원』 출간과 이 소설을 대본으로 한 드라마 「제중원」 제작에 동참해 각각 의학적인 부분과 일반적인 역사학 부분의 고증 자문을 맡고 있다. 저자들은 드라마와 소설이 극적 전개 과정에서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의학사의 실마리들을 사진 자료와 문헌 사료를 통해 소개하려 노력하고 있다. 저자들은 한국 근대 의학사의 여러 논쟁점들을 하나하나 짚어 나가며 의학사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해 간다. 세브란스 병원과 대한의원 사이의 서양 의학 기원 논쟁, 한의학과 서양 의학의 우월성 논쟁, 식민지 지배하의 의학의 위상, 의사 조직의 이합집산 등 드라마에서는 다뤄지지 않을 흥미진진한 쟁점들이 두 저자의 냉정한 필치 아래 되살아난다.

 

“의학이라는 소재를 통해 한국의 근대화와 그 이면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책. 딱딱한 의학 이야기와 무미건조한 역사 이야기를 어느 한 쪽에 기울어지지 않고 균형을 갖추어 재미있게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은 전혀 전공이 다른 두 사람이 합작을 했기에 가능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프레시안》

“제중원을 중심으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서양의학의 국내 토착과 과정을 짚은 책.” —《한국경제》

편집자 리뷰

‘사람을 구하는 집’ 제중원에서 시작하는 한국 의학사 산책

18세기 말, 이 땅에는 새로운 의학의 세기가 열렸다. 1885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자 근대식 병원이었던 제중원이 상징하듯 이 시기 한국은 서양 의학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외모와 체질을 변화시켜 나갔다. 그 과정은 이전의 변화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와 정도로 한국 사회를 바꾸었다. 아마 그 과정을 ‘근대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의학에 콜레라 같은 급성 전염병에 맞서는 일정한 대응책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검역이나 백신은 한의학에서 이루어지지 않던 새로운 방법이었다. 근대라는 시기를 거치면서 서양 의학은 한의학을 넘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2000년 일어난 의료 대란에 한국이 소용돌이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한국인의 일상을 장악한 서양 의학이 있었다. 대란이 본격화되면서 나타난 상황, 즉 병원이 문 닫을지 모를 상황, 실제로 병원에서 의사를 만날 수 없게 된 상황은 공포 그 자체였다. 물속에 들어가서야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듯이 의료 대란을 거치면서 한국은 이미 일상이 되어 버린 서양 의학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서양 의학 대 동양 의학

세계적으로 유래가 드문 의료의 이원화는 일제 강점기에 태동했다.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한의학은 어둠 속을 걷는 듯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먼저 수용한 서양 문명을 한국을 침략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일본이 먼저 서양 문명을 수용한 문명국임을 자처하는 가운데 한의학은 조선의 미개함을 보여 주는 상징 중의 하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전통 의학은 필요 이상 억압을 받았다. 당시 의학은 당연히 서양 의학이었고, 전통 의학은 이름 앞에 ‘한漢’을 붙인 한의학이 되었으며 한의사들도 의사가 아닌 의생으로 격하되었을 뿐더러 서양 의학을 배워야 했다. 한 한의사는 앞으로 다가올 한의학의 미래를 바라보며 “하늘을 쳐다봐도 별 하나 볼 수 없는 캄캄한 밤”이라고 했다.
장기무가 1936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한방의학 부흥책」은 그 캄캄한 밤하늘에 새로운 빛을 던지는 별이 되었다. 동시에 한의학의 부흥을 둘러싸고 많은 논자들이 논쟁을 벌이는 계기가 된다. 관립 의학교를 졸업한 서양 의사이기도 했던 장기무는 그의 저서 『동서의학신론』에서 한의학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전통 의학을 ‘한의(漢醫)’나 ‘한방(漢方)’이 아닌 ‘동의(東醫)’라고 불렀다. 한국 재래의 의술이 수천 년을 경과하면서 한국의 고유한 의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의학이 도태될 위기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면서 한의학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부흥을 도모하자고 했다.
경성 제국 대학 의학부 출신인 정근양은 「한방의학부흥문제에 대한 제언, 장기무 씨의 소론을 읽고」를 통해 당시 서양 의사들이 가진 일반적 견해를 피력했다. 그에 따르면 한의학을 별도의 교육 기관에서 가르칠 필요가 없었는데 의학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장기무나 세브란스 의학 전문 학교를 졸업한 방합신이 한의학의 부흥을 외쳤지만 정근양 외에 서양 의사 중 동서 의학 논쟁에 참여한 이는 적었다. 하지만 장기무나 방합신의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한의학에 대한 관심은 서양 의학에 대한 반성에서 생겼기 때문이다. 방합신은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서양 의학의 한계를 느꼈고, 대안으로 한의학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광야의 의사들

동서 의학 논쟁에서 그들이 느꼈던 한계는 항생제가 발견되기 이전 서양 의학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의학을 다시 바라보는 사람들이 서양 의학계 내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의의는 적지 않다. 그것은 개항 이후 일방적으로 한국이 수용해야 했던 근대에 대한 반성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일방적인 의료 정책에 비판의 메스를 들었던 한국인 의사들의 사례는 동서 의학 논쟁 외에도 삼일 병원 개원이나 에메틴 사건 등 여러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제의 억압이 무거워지면서 의사들은 “민족의 선구자가 되어 난국을 타개”하거나 “위생의 개량 발전과 서양 의학의 보급에 노력”하는, 독립 운동가와 계몽 운동가의 역할 사이에 놓이게 된다.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들 대부분은 소의(小醫)나 중의(中醫)를 넘어 나라를 구하는 ‘대의(大醫)’의 길을 택했다.
알렌이 의학 교육을 시작한 지 22년, 에비슨이 의학 교육을 시작한 지 10여 년 만인 1908년 6월 3일 오후 4시 제중원 의학교(세브란스 병원 의학교)의 첫 졸업생 7명이 배출되었다. 이들 중 김필순, 주현측, 신창희, 박서양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911년 말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 운동을 펼친 김필순의 일대기는 2008년 8월 MBC  광복절 기념 특집 다큐멘터리 「광야의 의사들」에 소개된 바 있다. SBS에서 방송 중인 드라마「제중원」의 주인공인 박서양은 1917년경 학교를 사임하고 연변으로 망명해 병원을 열고 학교 및 교회를 세워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안창호는 김필순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김필순이 그에게 보낸 편지 일부가 이 책에 실려 있다. 이 책에는 또한 알렌이 발행한 한국 최고(最古)의 근대 서양식 진단서(등록문화재 제445호)와 1885년 4월 10일부터 1886년 4월 10일까지, 제중원 의사 알렌과 헤론이 작성한 활동 보고서로서 19세기 후반 한국인들이 앓던 질병의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인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등록문화재 제447호) 등 문화재청의 의료 분야 근대 문화 유산으로 새롭게 등록된 동은 의학 박물관 소장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 이 책은 2009년 7월부터 11월까지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연재된 「의학사 산책」의 글을 모은 것이다.

목차

제중원의 옛 뜰을 거닐며 5 / 한국 현대 의학의 시원始原을 찾아서 13
1부   새로운 의학의 세기
1. 조선, 새로운 의학을 만나다 21 / 2. 제중원 탄생기 29 / 3. 개화기 청년 의학도 39 / 4. 정부, 제중원에서 손을 떼다 47 / 5. 광제원이냐 광혜원이냐 55 / 6. 세브란스, 병원을 세우다 63 / 7. 통감부와 대한의원 71
2부   의술을 배운다는 것
8. 한국 최초의 의사가 개업을 하지 않은 이유 81 / 9. 한국어로 만나는 『그레이 아나토미』 89 / 10. 의학교 졸업생, 군대 가다 101 / 11. 대의大醫의 길을 택한 최초의 면허의들 109 / 12. 의사 면허의 뒷이야기들 119 / 13. 의학교 들여다보기, 1945년까지 127 / 14. 의학교 들여다보기, 1945년부터 135 / 15. 보건 일꾼이 되는 법 143
3부     사람을 구하는 일, 진료
16. 제중원 의사 활약상 155 / 17. 제생의원의 변신 163 / 18. 활명수, 100년 전설의 기원 171 / 19. 의료 선교의 허와 실 179 / 20. 자혜라는 이름의 지배 189 / 21. 대장금에서 나이팅게일로 197 / 22. 이 해 박는 집 205 / 23. “병 안 나으면 돈 못 줘.” 213
4부   돌림병에 맞서다
24. 위생 경찰의 시대 225 / 25. 우두, 두창을 몰아내다 233 / 26. 호랑이가 살점을 뜯는 병 241 / 27. 소록도의 눈물 249 / 28. 크리스마스실의 그림자 257 / 29. 민족의 3대 독 265
5부    제중원의 아이들, 의사
30. 의학 박사, 논문 쓰다 275 / 31. 의사 단체 헤쳐 모이기 283 / 32. 인술과 이익 사이에서 291 / 33. 한의학의 부흥을 외치다 299 / 34. 독립을 꿈꾼 의사들 307 / 35. 최초의 사람들 315
더 읽어보기 324 / 사진 출처 326 / 찾아보기 327

작가 소개

박형우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0년 연세 대학교 의과 대학을 졸업했으며, 의사로서는 드물게 해부학 교실에서 수련을 받아 의학 박사가 되었다. 해군 제대 후 모교로 복귀하여 현재까지 해부학 교실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 전공은 인체 발생학과 기형학이다. 1992년 4월부터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 2년 6개월 동안 워싱턴 대학교의 소아 과학 교실 셰퍼드 박사 연구실에서 발생학과 기형학을 공부했다. 1996년 모교에 의사학과가 신설되자 초대 과장을 겸임했다. 의학사라는 새로운 영역에 뛰어드는 계기였다. 1999년부터 연세 대학교 의과 대학 동은 의학 박물관 관장을 겸임하고 있다. 요즘에는 해부학자인지 의사학자인지 주변에서 헛갈려 할 정도로 의학사에 정진하고 있다. 2009년부터는 대한의사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윤재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6년 연세 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여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4년 영국에서 1년을 보낸 외에는 내내 서울에서 살고 있다. 역사학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은 고등학교 때부터 가졌다. 세상을 다양하면서도 진중하게 바라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요즘은 굳이 역사학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지만 다른 삶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 적은 없다. 의학사는 우연한 기회로 만났다. 강렬한 만남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만남인 것은 분명했다. 요즘은 그 우연을 필연 같이 보이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희 대학교, 연세 대학교, 한성 대학교에서 강사를 지내고 현재 연세 대학교 의사학과 연구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독자 리뷰